다른 영화를 보러갔다가 
커다랗게 한쪽 벽면을 차지한, 검고 푸르딩딩한 포스터를 봤다.


731벌의 옷을 남기고 떠난 그녀
165cm, 230mm, size 7...
아내의 치수와 꼭 맞는 여자가 필요하다.




당장 보기로한 영화를 포기하고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스토리가 무라카미 하루키라서였는지,
음악의 류이치 사카모토라서였는지,
일본 영화라서였는지,
모르겠다.


그 검고 푸르딩딩한 포스터는
며칠동안이고 마음에 맺혀서는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틀이나 지났을까
야근을 한 다음날 아침,
장대비로 축축해진 신발로 다시 그 극장을 찾았다.


사람이 많지 않다고 다른 자리에 앉았다가
자리 주인이 와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그제서야 알았다.
비에 젖은 보라색 우산을 화장실에 두고 왔다는 걸.


우산을 가지러 황급히 나가려는데 아차,
입구쪽에 앉은 여자의 다리 옆에 가지런히 놓인 보라색 우산.
울컥하려던 마음을 다잡고 화장실에 갔더니 미안하게도
우산은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우산을 들고 다시 들어오는 길,
이번엔 입구쪽에 앉은 여자가 아차,
내 우산을 보고 놀란다.
같은 우산인데 같이 앉죠?
얼굴이 예뻤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의 뒷줄에 앉은 나는 예고편을 마저 보며 고민했다.










만약 이 영화를
"50대 남자가, 그리고 30대 여자가 1인 2역을 하는 75분짜리 영화"
라고 한다면
그 얼마나 건조할까,


영화는 실제로 건조했다.
친절한 나래이터씨가 상황을 설명해주었지만
친절한 사카모토씨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었지만
바삭바삭 말라 갈라지기 직전이지만
왠지 비가 올지 안올지는 관심도 없는 마른 사막을 만난 느낌.


에이코와 히사코, 토니 타키타니와 아버지 쇼자부로, 그리고
그녀의 보라색 우산, 나의 보라색 우산.
그리고 고독, 그리고 상실.


우산 덕에 하루끼식 감성과 싱크로한 걸까.
남자의 민망한 장발 20대 씬에서는 웃을까 말까 망설였음에도
왠지, 시간이 지날수록 아련하다.


영화는 가을옷을 사고싶다는 생각과 함께
토니의 집처럼 통유리에 전망이 가득 들어오는 곳에 살고 싶다는
내 오래된 소망을 또 자극하고 말았다.




p.s. 포스터엔 size 2라고 되어있지만
영화 속 나래이션은 'なな나나'라고 했으므로 위쪽엔 size 7로 썼다.


WRITTEN BY
쏘뎅
쏘뎅+기자=쏘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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