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털은 죄다 허옇고 머리가슴배에 팔다리까지 비쩍 골아 철지난 곤색 양복이 헐렁거리던 윗학년 수학선생님은 말했다. "공부엔 마스터 플랜이 있어야지, 마스터 플랜."

 

고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철도 없고 예의도 없고 마스터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만화영화에서 악당3 따위가 "예스, 마스터"하는 것은 본 것 같아서 주인님의 계획인가보다 생각했다. 웃지마라, 나름 열심히 머리굴린 결과다.

 

master plan. 사전이 알려주기로는 '기본 계획/종합 계획'.

그래 그 영어의 뜻은 그렇다치고 공부에 무슨 계획을 세우란 말이냐. 당시 며칠은 샤프 들고 밥숫가락 들고 베개 끌어안고 고민했지만 그놈의 기본 계획이라는 놈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시간은 흘러가고 대학은 들어가고 기차는 서울로 가고... 그러면 됐지 뭘 고민하고 자시고 하느냐는 결론에 이르렀고 나는 외쳤다. "노, 마스터"

 

 

 

2001년 취직을 했다. 졸업하고 한 9개월 놀았나, 원래 하려던 일은 아니지만 계속 놀기도 망신스럽고 대략 재미있을 듯도 해서 다녀보자 생각했다. 당시 ㅁ사 5년차였던 선배는 계속 시험이나 보라고 말렸지만 오래 놀고앉아있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익숙지 않아서 그냥 고맙게 직장인이 됐다.

 

입사 첫해엔 휴가가 2박3일. 고향에 다녀오니 끝이었다. 일은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휴가라는 녀석은 일주일 꼬박 채워 받아야 마땅한 줄 알았다. 멀쩡하게 회사다니는 날수를 채워야 하루씩 휴가가 생긴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선배들은 나름 생색을 냈지만 나를 포함한 부서 여동기 셋은 매우 배가 고팠다. 

 

이후 따로 모의한 적은 없지만 우리의 한해 목표는 휴가가 됐다. 2002년 여름휴가부터 우린 경쟁적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처음엔 A는 러시아, B는 싱가포르, 나는 일본 도쿄. 다음해엔 A 스웨덴, B 일본 홋카이도, 나 싱가포르...

 

일이 힘겨울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에겐 휴가가 있잖아!" 중간에 B가 결혼하면서 삼각경쟁체제가 붕괴되고 A의 부서는 몇번이고 바뀌었지만 어쨌건 우리는 휴가를 위해 살았다. 한해 휴가를 다녀오면 다음 휴가를 준비하면서 한해를 보냈다.

 

 

 

2006년 5월 24일.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다. 차장들이 모조리 부장이 되고 기존 부장들은 평소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구석구석 자리로 찾아들어가게 됐다. 회사의 앞날을 위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한편으론 두 눈에 쌍심지를 켜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파격인사로 인해 모든 부서의 인원이 줄었다는 것은 남아있는 아랫것들이 사라진 자들의 몫까지 일해야한다는 뜻이다. 곧 월드컵이 다가오는데 내가 일하는 회사는 월드컵 기간에 '뺑이'치는 곳들 중 하나이니 아랫것 한사람 한사람의 중요성이 무척 커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남몰래 추진중이던 결혼 1주년기념 남아공 여행 일정은 월드컵 기간 중에 쏘옥 들어있었을까.

 

내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휴가인데, 회사가 나를 고용한 이유는 단지 내게 휴가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다. 아니 그보다 직장생활 만 5년을 꼬박 채우면서도 이 직업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 하나 없이 휴가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더 엄청난 비극이다. 그 어느 직장인이 성공이 아닌 휴가만 꿈꾸고 살겠어. 13년전 그 선생님의 말씀처럼 "마스터 플랜이 있어야지"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말이다.

 

 


WRITTEN BY
쏘뎅
쏘뎅+기자=쏘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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