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비극은 그것이 시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현재의 애인과 함께 있을 때, 과거의 사랑을 대하는
무관심에는 특별히 잔인한 면이 있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을 건넌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中에서.
1시간 반 후면 형부의 손님들이 들이닥칠 저녁이었다.
장보러간 언니가 돌아오자 컴퓨터를 끄고 설겆이를 시작했다.
"효리때메 비디오도 못보고 나왔는데 금새 자고있지 뭐야"
다음 상황은 예기치못한 긴박함의 연속이었다.
아이는 잠들기 직전에 바나나를 바늘로 찌르고 있었는데
(과학나라 선생님과 함께한 실험을 재연중이었다)
잠든 아이의 주변에는 구멍난 바나나밖에 없었다.
바늘을 찾겠다고 아이를 깨워 윽박지르자 아이는 모르쇠 일관,
이불을 조물락거리는 동안 30여분이 지나갔고
바늘은 애매한 내방 책상 위에서 발견되었으며
언니와 나는 칼과 도마에 몸을 내던졌다.
번개불에 콩볶듯 찹스테이크와 만두와
떡치즈춘권(이름모름)을 구워
과일과 함께 상에 내놓은 뒤 마침 늦게온 손님들을 맞고
여자들끼리 큰방에 모여 남은 음식을 주워삼켰다.
준비하느라 급했던 마음에 주워먹는 것도 더할나위없이 급했고
결국 소화불량 상태로 불편하게 잠을 청했는데
본론은 여기부터다.
새벽 1시 21분. 불편한 자세로 두어시간 자고있는데 부웅~ 문자가 왔다.
[난가끔술먹으면네생각이마니나.전화번호도지웠는데
또렷이기억난다.그저잘살기바랄뿐인데..미안]였다.
중요한건, 이 번호가 누구인지 기억나질 않는다는 것.
문맥상 내가 만났던 사람인것 같은데...
혹시나 잘못 보낸 메시지라면,
상대의 번호 잘 확인하고 다시 뜻을 전하라는 뜻에서
[죄송한데요 누구신지 잘 모르겠네요]라고 써서
전송버튼을 누르자마자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5년전에 알았던,
'연인'이 아니라 그저 '인연'에서 끝이 났던,
아 무 개...
30권이 넘는 만화 <원피스>의 방해를 받으며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었는데
하필 기억력소동을 일으킨 오늘,
클로이와 화자가 헤어지는 부분을 만났다.
'네가 너이기에 사랑했지만
(그런 너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은 변했기에)
너는 여전히 그대로 너라서 헤어진다'는 것.
거 참 딱맞는 말이네, 보통씨.
일단 추천이다. 같은 작가의 <여행의 기술>보다 더 재미있고
훨씬 옛날에 (심지어 스물다섯살에) 쓴 글임에도 더 신선했다.
덧붙여 글쓰기의 새로운 방법론 측면에서 <여행...> 이상 가치있다.
무엇보다 내게는, 미안함을 그만 낭비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남았다.
p.s. 자꾸 내 삶을 침범해오는 과거들에게 경고 한마디.
좀 내버려두쇼. 하루하루 살기도 바빠 죽겠소.
혹시나 이 글보고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으나 내알바 아니오.
나도 순간순간 죄책감을 설득하려
'헤어짐에서 채이는 사람과 차는 사람이 선과 악인듯 느끼지만
사실은 둘 다 (계속 사랑하고픈 / 그만 사랑하고픈)
이기적인 목적이라는 점에서 선악의 구별은 불가하다'는
보통씨의 주장을 동원하고는 있지만
이건 나 자신을 위한 거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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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 쏘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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