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다 그러나 살아진다
ㅇ선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갓 입사해 수습 딱지를 달고 연수를 받던 때였다.
이바닥 1년 선배를 친구로 둔 남동기가 여럿이었는데
그들은 죄다 "1년선배 중 ㅇ씨를 조심하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했다.
긴장 속에 빡빡한 ㅅ부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속칭 '1진'이었다.
'깐깐하다, 걸리며 죽는다'는 악명에 걸맞게 차가워보이는 외모.
그리고 그녀와 첫 통화를 하게 된 것은
익숙지 않은 장소를 돌아다니며 묻고 또 묻고, 졸음과 싸운지 나흘째 되는 밤이었다.
"수습 ###입니다. **라인 보고드리겠습니다..."
한참 조목조목 질문을 당하면서 보고를 끝내니 선배가 물었다.
"그래, 지금 어디까지 왔어?"
"네, @@랑 ** 거쳐 %%경찰서에서 나가려는 중입니다."
"조사부랑 수사2계는 다녀왔어?"
"(아차) 지금 가려는 중이었습니다."
"###씨. 좀전에는 나가려던 중이라며.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아냐?"
"네 저..."
"@@부터 다시 돌고 보고해. 휴가간 니네 1진 돌아오면 마구 깰텐데 똑바로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그나이 먹어서, 둘러댄 거짓말이 들킨 것은 처음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1진이 되면 다 저럴까, 또록또록 논리정연하게 잘 가르쳐주는구나 싶었다.
듣기로는 성질이 더럽다던데 처음이라 봐준건지,
차갑긴 했지만 일부러 야단치거나 화를 내는 말투는 아니었다.
오래지않아 나는 ㅍ부서로 배치됐고 이 즈음의 나는
입사할 때 들은 ㅇ선배의 악명이 '타사 남동기들의 시기'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ㅍ부서에서 본 그녀는
다른 남동기들이 벌벌 떨도록 일을 잘하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약 2~3년뒤 ㅇ선배는 ㅈ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팀원이 겨우 세명이었지만 의욕적으로 새로운 섹션을 만드는 활기찬 분위기였다.
어느날, 인사동에서 시작된 술자리는 중간에두어팀이 합세하면서 거나해졌는데
그 중에 ㅈ팀과 선배가 있었다.
꽤 술이 센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전작이 과했는지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였다.
자리가 파하고 보니 나는 선배를 집까지 데려다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함께 강을 건너 선배를 내려주고 나서 나는 택시기사와 싸워야했다.
토사물 때문에 냄새가 난다며손님 못태우는 값과 세차비를 달라고 했다.
흥정끝에 값을 치렀지만 기사는나를 태우고 ㅎ동으로 가는 것을 거부했다.
한밤중에 강남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가느라 꽤 고생을 했다.
다음날 선배는 내게 상황을 묻고 점심을 사면서 전날 내가 쓴돈을 갚았다.
1진과 수습사이가 아닌 그냥 선후배 관계에서의 그녀는 전보다더욱 조곤조곤한 말투.
그러나 접근하기에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감성보다는 이성의 사람, 그런 느낌이 강했다.
얼마후 회사는 블로그를 만들라고 사원들을 닦달했고
어느 사이 선배와 나는 가끔 블로그에 들러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됐다.
ㅇ선배는 이틀전 사표를 냈다.
혹자는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하고, 혹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일이 맞지않았다더라 했다.
적성에 맞지않아서건 처우가 맞지않아서건회사를 뛰쳐나가는 사람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처음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저 사람은 정말 소중한 우리의 재산이다,괜히 내가 자부심마저 느꼈던 사람 중에
꽤 여럿이 사라졌다.
선배와 나는그저한번 야단치고 한번 데려다주고 몇번 댓글을 주고받은 사이일 뿐인데,
자꾸 눈이 뜨거워지려 한다.
스스로도 며칠에 한번은 회사 그만 둘 생각을 하면서
왜 그녀의 새 인생을 축하해주지 못하고 아쉬워만 하는 걸까.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다.